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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김원봉과 북한이야기 - 전광훈 목사 발언 궁금해서


안녕하세요

최근 1심 무죄판결로 나오신 전광훈 목사님께서 긴시간동안 연설?을 하셨습니다.

죄송스럽게도 그분의 많은 발언들을 귀담아 듣지 않았었는데,

유독 이부분에는 시선이 가게 되었고, 그발언이 어떻게 시작된건지에 대해서 정리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선 "이부분"이 무엇인지 보시죠


6·25 3대 전범 김원봉을 국군창시자의 영웅이라고 말했는데, 이거 간첩 아닙니까? 서독의 간첩 윤이상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보겠습니다. 서독의 간첩 윤이상의 묘지에 부인 김영숙을 보내서 동백나무를 헌화하는 것을 보셨죠? 이거 간첩 아닙니까?” (2019.10.9 문재인 퇴진 범국민대회)


기본적으로 전목사님께서는 약산 김원봉을 6.25 3대 전범으로 보고 계십니다.

=> 다음 시간에는 6.25 3대 전범에 대해서 포스팅해볼게요

진실일까요? 오늘은 김원봉에 대해서 논해보려고 합니다. 특히 "북한"관련된 사항들만


약산 김원봉

김원봉의 독립운동, "의열단"과 관련된 부분은 오늘 다루지 않고, 그가 우리민족을 위해 많은 희생을한 독립운동가임은 분명하다는 작은 말씀과 함께

오늘은 "북한"과 관련되서만 논해보죠


김원봉의 주요 타이틀
-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월북 및 북한에서의 위치

남한에서도 나름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김원봉"이 북한으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들이 있어 명확히 설명드리긴 어렵습니다만 남한의 정세가 나쁘며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은게 아닐까 싶습니다.(추측이요)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쪽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
- 사마로에게 월북 이전에 보낸 편지 중

김원봉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그대로 평양에 남았습니다.

이후 북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북한 헌법 제정 위원 참여, 국가검열상(검찰총장 및 감사원장 해당 장관급) 등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습니다.

김원봉의 북한 정권 서열은 7위 정도 였다고 하네요

북한 정권 수립 김일성(센터), 왼쪽 2줄 2번째(국가 검열상)


6.25 전쟁과 김원봉

김원봉은 전쟁을 반대했습니다. 심지어 가족들도 남한에 있었죠.

그런 김일성에게 김원봉은 두 달의 짧은 기간 만에 남쪽을 점령할 병력이 충분치 않아 세력이 약한 대한민국을 도와 미국이 참전할 것이고, 그러고 나면 오랜 전쟁으로 남북이 서로 이득 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나올 것이라며 전쟁을 반대하였다.
- 약산 김원봉 평전

하지만 결국 전쟁에 참여했죠.
- 공화국 남반부 해방 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중앙 선거 지도부(1950년 7월) 9명 중 1人
이 단체가 하는 일은 북한이 점령한 남한 영토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행정기관을 철폐하며 북한 통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 6.25 전쟁 중에 남파 간첩을 훈련하고 파견하는 것을 직접 지휘(국가 검열상)
-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 대표 로서 평안북도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
- 로력훈장의 첫번째 수상자

1951년 7월 17일에 로력영웅과 함께 신설된 훈장. 수여 취지와 목적은 로력영웅과 같다. 차이는 직접 참전하여 전공을 세우는 대신 후방의 군수, 병참 등의 지원업무를 담당한 기관이나 그 단체의 장에게 주로 수여된다.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미제의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조국 해방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정권 기관 및 당 단체 지도일군들에게 공화국 훈장을 다음과 같이 수여한다

 

 


6.25 전쟁 이후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선출
김원봉은 1957년 9월까지 북한 내각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음
1957년 9월 20일에는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국회 부의장 격)으로 선출

전쟁 이후에도 승승장구 하고 있었습니다.

김원봉은 조선로동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 1958년 3월에 김일성종합대학 초대총장
- 1958년 또 한 번의 '로력훈장' 

결국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에서 해임
이 때부터 모든 정치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958년 11월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사주를 받은 국제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했습니다.
- 김학철(조선의용대 출신)의 증언에 따르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후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했다고 하네요.

아내와 두아들 모두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but  김원봉의 최후에 대해 북한 정권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 정확히 알수가 없습니다.

극비에 붙이고 있어서 자세한 내막은 아직도 불투명하다.

왜 숙청되었을 까요?

장제스와 사제관게였다.(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인 김원봉, 교장인 장제스)
국민당군 장교로 임관한 이력(교관)
ㅈ선민족혁마당당이 국민당 남의사 지원을 받았음
남의사 총수 등걸이 김원봉의 군관학교 동기였다.
김일성으로 부터 국민당 간첩으로 몰아붙여 뒤집어 씌우기 좋았다?

북한에서는 김원봉이 악당으로 영화에 자주 등장했다고 하네요


이러한 이력이 있다보니, 김원봉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현충일에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하디보니 더 논란이 많이 되었죠

어찌 되었던 김원봉은 월북 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고, 북한 정권에 부역하여 대한민국에 직접적 피해를 주기도 했다는 평이 많습니다.

- 국가검열상에 있을 때 6.25 전쟁 도중 간첩단을 파견
-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 당국이 평양에 본적을 둔 간첩 김춘옥 외 4명을 체포해 이들을 취조한 결과, 김춘옥은 6.25 전쟁 당시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선거 방해, 모 정당 와해를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했다

민필호의 [김구, 장보고, 앙드레김] 을 보면 "김원봉은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묘사되기도 합니다.


오늘 정리하고 싶었던 것은, 약산 김원봉의 북한에서의 행적입니다.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추앙받지 못하는 김원봉
남한에서는 노력훈장을 두번받은 공산주의자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미움을 받아 숙청당한 그런 인물입니다.

숙청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수가 없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김원봉 언급이 하필 현충일 기념사였던 것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원봉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숙청의 대상이 아니었을까요?
당시 정치판에서는 본인의 세력이 없어 살아남을 수가 없던건 아닐까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세를 낮추어서 김일성에게 머리를 숙였어야 될 것입니다.
약산 김원봉은 그런 투사가 아닙니다.

일제라는 "적"이 있을때는 훌륭한 투사였지만, 그 후에는 본인들 끼리의 세력다툼에서 밀린 것이죠
북한은 김일성, 남한은 이승만으로 평정되었죠
한국 이승만, 임정의, 김구, 여운형, 송진우, 서재필, 김규식 너무 다양한 세력 중 : 이승만
북한 김일성, 박헌영 등등 중 : 김일성

제 생각에 김원봉은 남한에 있든 북한에 있든 숙청당하셨을 것 같습니다.

김원봉은 마냥 무한 존경할 수는 없지만, 비운의 위인 정도로 설명드릴 수 있을것 같습니다.

만약 김원봉이 1945년 일제와 투쟁중 돌아가셨다면 많은 존경을 받는 엄청난 위인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독립운동"기록 까지 저평가 받는 일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며 이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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